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토바 덴노 (문단 편집) === 신기(神器)가 없는 즉위 === 고토바 덴노는 불과 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주에이(壽永) 2년(1183) 7월 25일, 호쿠리도(북륙도)의 맹장이었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키소 요시나카]](木曾義仲)의 겐지 군대가 교토에 육박하자 무능력한 [[타이라노 무네모리]]가 이끌던 [[헤이케]] 정권은 [[타이라노 도쿠시]][* 전대 헤이케 당주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딸로 [[다카쿠라 덴노]]의 중궁이었다.]의 아들 [[안토쿠 덴노]](安德天皇)와 '''3종의 신기'''를 받들고 서국(西國)으로 피신했다. 이를 따르지 않고 교토에 남아 있었던 [[고시라카와 덴노|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과 공가(구케) 사이에는 이세 헤이시, 즉 헤이케를 추토할 것인지 아니면 평화적인 교섭을 통해 주상인 안토쿠 덴노와 삼종의 신기를 귀환시킬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었다. 이 과정에서 헤이케 타도에 공을 세운 기소 요시나카나 간토(관동)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에 대한 은상 문제 및 정무의 정체, 공석이 된 옥좌를 채우기 위해 새 주상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부상했다. 8월에 이르러 고시라카와 법황은 삼종의 신기 없이 그대로 새 주상을 즉위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안토쿠 덴노에게 기대를 걸지를 두고 점쳐보게 한 후, 점을 친 결과를 가지고 측근인 구조 가네자네(九條兼實)에게 칙문했다. 결과는 후자인 안토쿠였지만 당시 헤이케 토벌을 위해 새로운 주상을 세울 의사를 굳히고 있었던 법황은 재차 점치게 해 '길흉이 반반'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고시라카와 법황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불만을 가진 구조 가네자네였지만, 천자의 자리를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다는 입장에서 새로운 주상을 세우는 데 찬동했고, 선대 [[게이타이 덴노|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도 즉위 이전에 이미 천황을 칭하고 그 다음에 삼종의 신기를 받았던 선례가 있다는 대답을 전했다. 다만 《일본서기》에 이런 기술은 없고 그냥 구조 가네자네의 오인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10일에 고시라카와 법황은 재차 좌•우•내대신 등에게 의견을 요구했으며 나아가 박사들에게까지도 자문을 요구했다. 그 가운데 후지와라노 도시쓰네(藤原俊經)가 올린 <이려파자류초>(伊呂波字類抄)가 있었는데, >"신기는 신령한 물건이니 (정당한 주인에게)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神若爲レ神其寶蓋歸) 라고 하여, 신기 없이 즉위할 새로운 천황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새 주상의 후보로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안토쿠 천황의 이복동생이었던 4세의 다카히라 친왕을 즉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구칸쇼》에는 제4황자의 성격이 좋고 낯가림도 심하지 않은 점을 법황이 높이 샀다고 하고, 아울러 법황의 후궁이었던 단고노 쓰보네(丹後局)도 찬동했다고 한다. 8월 20일, 태상천황(太上天皇,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센(院宣, 원선)을 받는 형태로 천조(踐祚)를 거행했다. 그 의식은 삼종의 신기가 없다는 것을 빼고는 양위의 예를 그대로 모방해 행했고, 즉위식도 마찬가지로 겐랴쿠(建曆) 원년(1184) 7월 28일에, 똑같이 신기가 없이 행해졌다. 안토쿠 천황이 퇴위하지 않은 채 즉위했기에, 1183년부터 헤이케가 멸망하는 1185년까지 두 천황의 재위기간이 2년 겹친다. [[단노우라 전투]]로 헤이케가 멸망하면서 다른 헤이케 일문의 사람들과 함께 안토쿠 천황도 바다에 투신 자살했지만, 삼종신기 가운데 보검만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채 결국 회수되지 못했다. 분지 3년(1188) 9월 27일, 보검의 수색을 맡았던 사에키 가게히로(佐伯景弘)로부터 보검을 찾는데 실패했다는 보고가 전해진 뒤 수색은 사실상 중지되었다. 이후 겐큐(建久) 원년(1190) 1월 3일에 행해진 천황의 원복 의식도 삼종신기가 모두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조겐(承元) 4년(1210)에 [[준토쿠 덴노]](順德天皇)의 천조에 즈음해서 이미 상황으로 물러나 있었던 고토바 덴노는, 삼종신기가 교토로부터 꺼내지기 1개월 전에 [[이세 신궁]]에서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헌상했던 검을 보검 대신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하지만 고토바 상황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겐랴쿠 2년(1212)에 다시 게비이시(검비위사)인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能)를 서쪽으로 파견해 보검 탐색에 임하도록했다. '전통'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궁정 사회에 있어서 황위의 상징인 삼종의 신기가 갖추어지지도 않은 채 치세를 보냈던 고토바 덴노에게 이것은 일종의 '컴플렉스'로 그가 폐위되어 붕어하는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그의 천황(혹은 상황)으로서의 치세를 비판할 때면 으레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신기의 부재'''였다. 이것을 천황의 부덕과 연결지어 말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일련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황권의 존재를 안팎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그의 과격한 성격만큼이나 강경적인 정치 자세, 나아가 '''조큐의 난'''이라고도 부르는 그의 인생 그리고 일본 천황가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했던 역사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토바 천황은 자신이 무예와 수렵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성격 또한 과격하고 불같아서, 어느 날에는 죄를 짓고 게비이시에게 붙들려온 도적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직접 도적의 팔을 잡아 비틀기도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